2017년 먼 친척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고모 할머니는 저에게 요즘 어느 회사에 다니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시 KPMG 삼정회계법인 딜 본부에 있던 저는 조심스레 삼정회계법인에 다니고 있다고 했을 뿐인데, 할머니는 갑자기 눈이 커지시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할머니: “삼성에 있나????” (할머니들한테는 골드만삭스고, JP모건이고, 그냥 삼성이 짱임)
나: “아, 아니요… 삼정! 삼정! 회계법인입니다.”
할머니: “니 회계사가????”
나: “아, 아니요…” (삼성도 아니고, 회계사도 아닙니다… 그냥 죄인입니다…)
할머니: (안타까운 표정으로) “… 그래 많이 먹고 가라.”
왠지 죄 지은듯한 기분… 저는 지금도 가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먼 친척들을 만날 때면 비슷한 상황에 시달립니다.
아래 일 역시 작년에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들: “니가 지금 판사제???” (웅성웅성)
나: “아, 아니요… 제 동생이…”
저는 그날 그렇게 제 동생 옆에서어 두 손을 모으고 선 채로 먼 친척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제 동생이 판사가 됐다며 대단하다며 칭찬하는 모습을 5분 넘게 벌서듯 들어야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내내 하락한 성적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내내 제 반 등수는 제 여동생의 전교 등수보다도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반장에, 학교 대표로 글쓰기 대회, 웅변 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 수학 경시대회, 축구 대표까지 못하는 게 없었는데 중학교로 올라간 이후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중 1때 반에서 4등을 한 기말고사를 기점을 마지막으로 6년 간 제 성적은 꾸준히 하락했습니다.
MBTI도 분명 초등학교 때는 극 E였을 겁니다. 발표도 무조건 내가 해야 했고, 지는 거라고는 못참아 매일하는 축구에서 지면 분해서 눈물을 흘렸던 욕심쟁이가 중고등학교 6년을 거치며 의기소침해지며 패배의식에 젖어 들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가서는 패배의식이 더 커졌고, 자존심이 쎘던 저는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난 공부를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거야!’를 어필하기 위해 수업 시간에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자려고 고개를 쳐박거나 야자 중간에 짐 싸서 도망가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PC방이니 만화방이니 싸돌아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우울한 이미지이고, 인생에 목표가 없고 왜 사는지 이유도 없던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19살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갔고 인생을 바꾼 영화 ‘월스트리트’를 보고 금융 영화를 찾아보며 새로운 꿈을 키웠지만, 패배의식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던 편입생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과목, 공부를 하다 보니, 성적이 점점 올라가 당시 미국 대학 순위 40위권 대학교에 금융학과로 편입에 성공했습니다. 더 좋은 학교로 못 간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는데 자기계발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 ‘목표가 커야 한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것이, 당시에는 저에게 그 대학교가 너무나 과분한 대학이라고 생각해, 그 이상의 학교는 원서를 넣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편입에 성공한 저는 그 때부터 또 극심한 차별에 맞서야 했습니다. 일단 편입을 하면서, 학점을 많이 인정 받지 못해 제 동갑내기 친구들이 4학년 졸업 반을 시작할 때, 저는 2학년으로 시작했습니다.

거기다 편입생이었기 때문에 스터디그룹에 넣어주려고 하지도 않고, 스터디그룹에서도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토론하고 하는데 저에게는 절대, 아무도 질문을 안했습니다. 당연히 모를 거라고, 깍두기 취급을 당했죠.
그래서 쪽팔려서, 저를 증명하기 위해 그때부터 남들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편입한 다음 해 여름, 운좋게 국내 증권사 기관 세일즈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증권사 인턴을 하며 처절하게 발리다
‘이제 됐다! 드디어 증권사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고든 게코를 따라가자!’라고 생각하고 출근했는데, 거기서 또 수난의 3개월을 보내게 됩니다.
당시 그 증권사 이사님은 본인 아들과 두 살 밖에 많지 않은 아들뻘인 저에게 관심이 많으셨고 장난도 심하셨습니다. 시간이 많으셨는지, 아침부터 인턴인 저에게 농담을 걸고 이것 저것 물어보고 챌린지를 했는데, 아는 게 거의 없던, 정말 무식한 저를 보고 독설을 많이 퍼부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무식했냐면, 재테크에 관심 있는 한국의 아주머니들도 다 아는, 미국의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준(연방준비은행)을 몰랐습니다. 이사님이 “새벽에 연준에서 발표 난 거 봤어?”라고 했을 때도, “예? 연준이요…?”. 당시 제가 아는 연준이라고는 미국에서 만난 친한 동생 손연준 밖에 없었거든요.

그 중에서도 가장 쪽팔렸던 것은 저보다 두 살 어린, 미국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유펜에 다니고 있는 다른 인턴 동생과 대놓고 맨날 비교를 하며, ‘너는 정말 대단하다 (대가리 단단하다), 얘보다 나이도 많은데 왜 더 모르냐, 내가 생각한 금융학과 대학생 수준이 아니다, 이런 수준으로 증권사 인턴이라니’ 등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팩폭을 매일 당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증권사 인턴을 시작할 당시 저는 편입에 성공하고 원하던 금융을 전공하면서 앞으로 창창대로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날고 기는 아이비리그, SKY 애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과 그들에 비해 나는 너무 무식하고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이죠.
증권사 인턴 이후 180도 바뀐 내 생활
지금은 이렇게 글로 적지만 당시에 두 살 어린 동생과 그 자리에 앉혀 놓고 비교를 당하고 수준 이하라는 팩폭을 당할 때는 너무 쪽팔리고 앉은 자리에서 식은 땀이 났습니다. 그렇게 증권사 인턴 생활 중에 충격을 많이 받았고, 그 이사님은 퇴근 길에 저와 함께 나서며 진지하게 조언을 했습니다. “화폐전쟁이라는 책이 최근에 나왔는데, 그 책 한번 사서 읽어봐라, 너는 내가 생각한 대학교 3학년의 수준이 아니다.” “너는 내가 생각한 대학교 3학년의 수준이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머리에 망치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저는 바로 그 책을 사서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그렇게 매일 같이 자존심 짓밟혀가며 팩폭을 당하고 때로는 구박을 받았지만, 한번도 이사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에 대한 애정어린 질타로 생각하고, 그냥 무식한 제가 너무 부끄럽고 답답했을 뿐이죠.

이사님이 추천한 화폐전쟁은 중국인이 쓴 금융의 역사, 연준과 달러의 역사에 대해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인데 도대체가 알아 먹을 수가 없어 책이 도저히 진도가 안나갔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다시 처음부터 읽고 그러다보니 그 이사님은 너는 일주일 째 30페이지를 못넘기고 있냐고 또 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30페이지를 못 끝낸 채 증권사 인턴 생활도 끝났습니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 독서로 급성장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화폐전쟁 책을 이해가 어려워도 읽고, 다시 읽고,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서 읽고 하다 보니 책이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한권이 읽히고, 두권이 읽히자, 그 이후로는 닥치는 대로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무식하던 걸 모르던 사람이 무식한 걸 깨닫게 되었을 때, 허기진 사람이 음식을 입안에 구겨 넣듯, 머리에 지식을 집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증권사 인턴을 했던 그 해 여름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 생활을 하면서 논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도서관에 박혀서 너드처럼 공부했습니다. 하버드대 교수 니얼 퍼거슨이 쓴 책들,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 로버트 쉴러 교수 등 유명 석학들이 쓴 경제, 금융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CFA 레벨 1, 2 모두 3, 4학년 때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CFA 2차 시험 10일 전에 대학교 졸업식이었는데, 공부할 시간이 아까워 졸업식에도 불참하고 도서관에 박혀 있었고, 저녁 먹으러 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미리 저녁을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쭉 공부를 잘했던 엘리트들은 이 글을 보면서 그깟게 뭐 대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득하게 공부를 해본 역사가 없는 저, 평생 공부는 안할거라고 부모님도 반 포기했던 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책들을 읽고, 자격증 공부까지 매일 같이 하다 보니 어렵던 학교 공부도 너무 쉬웠습니다. 전공 수업에서는 금융이든 어렵다고 소문난 회계, 통계 수업까지 100명 넘는 클래스에서도 1등 할 정도로 실력이 급상승한 것입니다.
금융 영화 몇 편 보고 금융권 입사를 꿈으로 정했던 애송이가 꿈을 가지고 도취된 채 인생 즐기던 시절이 2005-2009년이었다면, 증권사 인턴을 했던 2009년부터 2013년까지는 독서와 공부에 올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증권사 인턴 중 가혹한 피드백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인 보상
증권사 인턴 시절 받았던 가혹한 피드백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여 성장한 것이 계기가 되어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려 원하던 회사 원하던 부서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때의 증권사 인턴 경험은 훗날 외사 PE에 합격 할 수 있었던 계기도 마련해줬습니다.

저는 외사 PE에 지원하는 뱅킹 출신, 아이비리그 급 출신들에 비해 학벌, 경력 등에서 많은 면이 부족했기에, PE든 외사 IB든 면접에서 항상 뭔가 밑지고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PE 최종 면접에서 한국 대표님과 2시간이 넘는 빡빡한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첫 한시간 동안 철저히 궁지에 몰리고 발리던 저는, 면접 중에 제 인생을 바꾼 계기로 증권사 인턴 시절을 설명하며, 당시 증권사 이사님께 맨날 혼나고 깨지고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정신을 차렸고, 그 때 이후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합격한 저를 어느 날 그 츤데레 대표님이 방으로 불러 물었습니다. “너 솔직히 면접 때 떨어트리려고 했는데 왜 뽑았는지 아니? 너가 증권사 인턴하면서 너 혼냈던 그 윗사람 말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하려고 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뽑았다.”
성장과 성공도 습관이 된다

건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태도는 그 이후로도 제가 성장하고 인정 받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그래서 저는 지금도 후배들이나 강의 수강생 분들에게 그 태도를 가장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냉혹한 피드백과 갈구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 이사님이 저를 갈구지 않고 “에휴 저 멍청한 놈, 빨리 인턴 마치고 미국으로 가라, 귀찮다.”라고 생각했으면 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이유도 없이 기를 꺾고 힘들거야, 안될거야 하는 사람은 너무너무 싫어하고, 인연도 끊어버리지만, 차라리 쌍욕을 섞어서라도 혼내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한번 성장을 한 이후에 저는 비교적 많은 일에서 성장과 작은 성공을 하면서 패배주의에 쩌들어 살았던 인생 전반부와는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작은 성공이라도 한번 해봤다, 해냈다는 습관이 생기면 더 많은 다른 일에 또 자신감이 생기고, 이기는 원동력이 되더라구요.